배정남이 미우새를 통하여 과거가 재조명 되면서 배정남에 대한 관심이 상당히 높아지고 있는데요. 어려운 과거를 극복하고 현재의 자리에 오른 배정남을 응원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배정남 어린시절

배정남의 어린시절이 미우새를 통하여 알려지면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요. 어릴 때 부모님이 이혼한 다음에 할머니 손에서 자랐다고 합니다. 초등학교 2학년 때는 큰 이모와 작은 이모 집에 맡겨졌다고 초등학교 4학년때 아버지와 연락이 닿아 함께 살게 되었다고 하지요.


그러나 아버지 직업이 지방을 돌면서 배선을 까는 일이어서 한달에 한 번 집에 들어올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 때 살던 집이 미우새에서 살던 그 집이었습니다.


배정남은 이런 어려운 시절을 극복하기 위해서 중학교 때부터 아르바이트를 했고, 신문배달, 주방설거지도 했다고 하지요. 이 때부터 미술에 관심이 있었고 그림을 그리거나 예술에도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배정남은 부산공고에 입학을 했고, 남들이 3학년 2학기때 나가는 취업을 1학기때부터 시작을 했습니다. 공장에 나가서 일을 하면서 정신을 차렸고, 이곳의 사람들을 보면서 나쁜 친구들을 싹 다 정리했다고 하지요.


배정남이 허리가 좋지 않은데, 어렸을 때부터 일을 많이 하다보니 허리가 안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지요. 그리고 배정남은 대학교에 진학을 하게 되는데요. 미우새에서처럼 대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싶어서 등록금을 빌려서 입학을 하게 되지요.



어렵게 등록금을 냈는데, 학교를 다니게 되면 책값이나 재료비 등이 계속 들고, 도저히 학교 다닐 엄두가 나지 않아 30분만에 환불을 받으러 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절반만 환불이 된다는 것을 알고 한달 정도 학교를 다니다가 그만두게 되지요.


배정남 모델 성공비결

배정남은 부산의 옷가게에서 점원으로 일을 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배우 김민준이 우연히 가게에 들렀고, 김민준의 권유로 모델 일을 시작하게 됩니다. 김민준의 추천으로 서울에서 잡지 촬영도 하고 패션쇼에도 서게 되지요.



그런데 배정남은 키 컴플렉스가 있었다고 하는데요. 사람들이 배정남 키를 172cm로 보고 있는데, 실제 키는 175~176cm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는 키가 크다고 하지요.


배정남은 모델치고 작은 키 때문에 컴플렉스를 가졌지만, 자신의 작은 키를 탄탄한 몸으로 커버를 하면서 성공을 하게 됩니다. <나도 나만의 무기가 있어야겠다 싶었다. 내 키가 작으니 남들보다 좋은 몸을 만들어서 내세웠다. 당시 내가 워킹하다가 상의를 오픈하면 함성이 터져나왔다. 아직까지도 몸 상태는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배정남은 상당한 노력파로 알려져 있는데, 모델도 엄청난 노력의 결과로 만들어진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배정남은 모델로 성공을 한 이후, 류승범의 추천으로 배우로 데뷔를 하게 되었고, 미우새를 통하여 대세 배우가 된 것 같습니다.


배정남이 앞으로도 승승장구 하기를 바라며, 그의 활약을 응원합니다!

가수 조덕배의 노래는 아직도 사랑을 받는 노래로 그의 대표곡으로는 꿈에, 그대 내맘에 들어오면, 나의 옛날이야기 등이 있습니다.


조덕배는 나이는 1959년 8월 21일생인데요. 한흥예술고등학교를 졸업했고, 데뷔는 1985년 1집 앨범으로 데뷔를 했습니다. 조덕배는 2살때 소아마비를 앓게 되면서 그 후유증으로 평생 목발을 짚고 있습니다.



조덕배 재벌 2세

조덕배는 재벌 2세로 유명합니다. 조덕배는 당시 삼호그룹 조봉구 회장의 조카로 본인이 직접 서른살까지 건설회사를 운영했습니다. 그런데 전두환 정권시절 그룹이 갑자기 공중분해가 되지요.


<1980년대 사람들이 돈병철땅봉구라고 할 정도였다. 그 당시 나는 삼호그룹이 건설하던 빌딩과 아파트 외장과 도장 공사를 독점 공급 받는 회사를 운영하고 있었다. 당시 삼호하파트 외벽이 산뜻한 노란색감으로 유명했는데 전부 내가 공사를 맡아 진행했던 것이다. 승승장구 잘 나가던 우리 집안이 몰락한것은 바로 작은 아버지 집 마당에 있던 미루나무 한 그루 때문이다>



<이순자 전 영부인이 서울 방배동에 있는 작은 아버지 집으로 찾아왔다. 그 정원에 500년 된 미루나무가 있었는데, 그것을 자신의 정원으로 가져가고 싶어했다. 그러자 숙모님이 그 자리에서 거절을 했다>


<그 제안을 거절한 이후 외압이 시작되었고, 결국 신군부에 충분한 자금을 제공하지 않았따는 이유로 삼호그룹은 20억 달러에 달하는 재산을 빼앗기며 국제그룹과 함께 해체 당했다>


<그때 조덕배도 함께 도산을 하게 되는데 손에 남는 것은 3800만원짜리 어음 한 장 뿐이었다. 삼호그룹의 어음은 당시 시장에서 현금처럼 유통이 되었고, 이 어음은 조덕배의 가수 데뷔 밑천이 되었다>



<그때 집안이 어려워지지 않았다면 가수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편하게 사업하며 돈만 써대는 로열패밀리의 막내로 살아가지 않았을까? 결과적으로 전두환 전대통령이 가수 데뷔를 도와준 셈이니 감사하다>라는 말도 덧붙였습니다.


조덕배의 말을 들으면서 당시 군정권이 얼마나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는지 알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요즘과 같은 시대에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요.


조봉구 회장은 이 사건에 대해서 침묵을 하다가 1997년에야 미국에서 소송을 벌이며 정권에 빼앗긴 그룹에 대하여 이야기를 시작했고, 조덕배는 2011년 과거 이야기를 언론을 통하여 공개했지요.



조덕배의 인생은 참으로 파란만장했던 것 같습니다. 꿈에, 나의 옛날이야기, 그대 내 맘에 들어오면 등의 불후의 명곡도 많이 발표를 했고, 대마초 흡입 등으로 4차례 구속도 되고, 뇌출혈로 쓰러졌다 재기 하는 등 인생이 참으로 파란만장했지요.


조덕배는 제2의 음악 인생을 시작하고자 꾸준한 노력을 하고 있는데요. 아직도 조덕배의 노래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만큼 그가 좋은 노래를 많이 들려주기를 기대해봅니다.

미키김 김현유는 구글 상무로 세계적으로 인정 받는 인제입니다. 실리콘밸리 구글 본사에서 2007년부터 근무하며 최고 경영진에게 받는 상을 2년 연속 수상하였고, 현재 구글 하드웨어 제품들의 아시아 총괄을 맡아 한국에 나와 있지요.


그는 한국의 여러 방송에도 출연을 하여 화제가 되었는데요. 미키김과 같은 인물이 많이 나와야 대한민국의 경제가 더욱 발전할 수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세계적인 기업을 이끄는 대한민국인 미키김 김현유의 성공 비결은 무엇일까요?



미키김 김현유

김현유 나이는 1976년 6월 17일생입니다. 연세대학교와 버클리대학을 나왔으며, 삼성전자 무선사업부 해외영업을 담당하다가 구글 신규사업제휴팀 매니저, 구글 사업체유팀 팀장과 상무를 거쳤습니다.


미키김은 2012년 미국 라스베거스에서 열린 CES 에서 소니와 LG 전자 등 글로벌 TV업체들과의 제휴를 주도하여 구글 TV 신버전을 성공적으로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프로젝트를 통하여 구글의 최고 경영진 상을 두번 연속 수상할 수 있었지요.



미키김의 성공 비결

미키김은 계획력과 실행력을 바탕으로 자신이 이루고자 했던 것을 계획하고 실행에 옮겼습니다. 꿈을 꾸는 것에 그치지 않고 직접 실행에 옮기며 성공의 발판을 마련한 것이지요. 보통 사람들은 꿈은 잘 꾸지만, 직접 실행하기 힘든데, 미키김은 어떤 하나를 목표로 꾸준히 실행하고 실천에 옮겼습니다.


미키김은 4년 반동안 삼성에서 근무를 하다가 퇴사를 하고 미국 버클리의 하스 경영대학원으로 진학을 하게 됩니다. 미키김은 여기서 하스 테크 클럽의 회장으로 당선되어 활동을 하게 되지요. 대학 생활을 하면서 자신이 원하는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했고, 구글에 대한 관심을 항상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미키김의 구글 사랑은 대단했는데요. MBA동기들이 제 이마에 구글이라고 쓰여 있다고 할 정도였다고 하니 말이죠. 이것이 발판이 되어 미키김은 구글 신규사업팀에 인턴쉽을 거쳐 인터뷰 제안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미키김은 겸손하게 자랑하는 기술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내가 한 일을 누가 저절로 알아주겠거니 생각하면 안되고, 스스로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등 적극적으로 커뮤니케이션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철저하게 현지화를 하여 자신을 현지에 맞게 변화시켰습니다. 그 나라에 가면 그나라의 법과 말을 익혀야 하듯이 미키김은 철저하게 자신을 현지화하여 좀 더 빠르게 성공할 수 있었지요.



미키김의 이런 노력이 세계적인 기업에서 인정 받을 수 있었던 비결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누군가에게는 그저 꿈의 직장이라고 불리는 곳을 그는 꿈인 동시에 목표를 실행하기 위한 발판으로 생각하고 끊임없이 노력한 덕분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여러분도 성공하고 싶다면 지금 당장 꿈을 목표로 세우고 실행하려는 실행력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윤상현은 꾸준히 배우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가운데, 윤상현 아내 메이비가 최근 셋째를 출산하며 다둥이 부부가 되었습니다. 윤상현과 메이비는 조금 늦은 나이에 결혼을 했지만 벌써 자녀가 둘인데, 정말 자녀계획을 빠르게 잘 세운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현재 윤상현은 딸 두명과 아들 한명을 두고 있는데요. 거의 연년생으로 메이비가 상당히 많은 고생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윤상현은 출산과 육아로 힘들어하는 메이비를 존경하고 사랑한다고 자신의 SNS에 표현을 하기도 했지요.



윤상현 가수의 꿈

윤상현하면 사실 연기보다는 노래 실력으로 더 주목을 받았습니다. 윤상현 꿈 역시 배우보다 가수의 꿈을 더 크게 꿨다고 합니다.


<고등학교 이후에는 가수의 꿈을 꿨다. 그런데 이상하게 오디션만 가면 실력 발휘를 못했다. 노래를 부르는데가 없어서 제 방에 특어박혀 불렀는데 미친놈이라는 소리도 많이 들었다. 20대 후반이 되니 어머니가 이제 그만 좀 하라고 하시더라....>


이후 윤상현은 의류사업과 식당을 하다가 서른이 넘은 나이에 가수에 도전을 했지만, 또 실패를 했습니다. 가수를 만들어준다고 한 기획사에서 노래는 안시키고 허구한 날 드라마에만 출연을 시켰다고 하지요.



그러나 윤상현은 배우로 성공을 하고, 여러 예능을 통하여 자신의 노래 실력을 발휘하는 기회가 생기기도 했습니다. 잘생긴 외모에 뛰어난 노래 실력까지 가지고 있어서 윤상현이 더 주목을 받을 수 있었지 않나 생각됩니다.


박근형에게 비난 받은 윤상현

윤상현은 첫 데뷔 드라마 <백만장자와 결혼하기>에서 발연기로 굉장한 비난을 받았습니다. 이를 말하듯 박근형은 승승장구라는 예능 프로그램에서 발연기를 하는 후배들을 비난하기도 했는데요.


<촬영에서 스탠바이가 들어가면 갑자기 감정을 잡겠다고 하는 후배들이 있다. 우리는 그 배우가 감정을 잡을 때까지 멍하니 기다린다. 그리고는 잠시 뒤 그저 눈물을 흘리는게 전부다. 우리끼리 이런 똥배우랑 연기를 해야 하느냐라고 말한 기억이 난다>


박근형은 똥배우가 윤상현이라고 직접 언급을 하지 않았찌만, 윤상현이 박근형에게 혼난 이야기를 직접 출연을 하여 언급을 했습니다.


<박근형 선생님이 승승장구에 나와서 똥배우론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에 뜨끔 했다. 사실 선생님이 말씀하신 똥배우 같은 배우가 바로 나였다>



<연기를 제대로 배우지 못한 상태에서 드라마 캐스팅이 됐다. 첫 드라마였던 백만장자와 결혼하기 대본 리딩 때 박근형 선배님이 전 출연자 스태프들이 있는 자리에서 나를 혼내셨다>

<내 연기를 보고 어디서 저런 애를 데려와 주인공을 시키느냐며 크게 화를 내시기도 했다. 촬영 전날이면 전쟁이 났으면 좋겠다고 기도를 하고 잠들만큼 연기하는게 괴로웠다>


윤상현은 본인이 직접 똥배우였다고 자수를 했지만, 이에 박근형은 윤상현의 말에 반박을 하게 됩니다. <윤상현이 그런 말을 했나? 내가 앞서 똥배우라고 질책했던 대상은 특정인물이 아니라 모든 연기자 후배들을 염두해두고 말한 것이다>


<똥배우는 내가 어렸을 때 학생극 할 때 연기는 못하면서 잘난체 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누굴 꼬집어말한다기보다 우리 후배 연기자들이 연기는 못하면서 스타랍시고 배우로서 본연에서 벗어나는걸 경계하라고 주의를 준 것이다> 라고 언급을 했습니다.



윤상현이 본인이 똥배우였다. 연기력이 미달이었다고 말했다는 것은 그만큼 배울 자세가 되었다는 것일 수도 있고, 윤상현의 성격과 착한 심성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무튼, 이런 과정이 있었기 때문에 윤상현의 연기력이 계속 늘고 있는게 아닌가 생각되네요.

홍진호는 우리나라에서 임요한과 함께 가장 성공한 프로게이머입니다. 1세대 게이머라고 할 수 있는데요. 최근에는 방송에도 자주 출연을 하면서 엄청난 인기를 얻고 있습니다. 프로게이머로도 성공을 하고 방송인으로도 성공을 했지요.


홍진호가 프로게이머가 된 이유를 알아볼까 합니다.



홍진호는 고등학교 시절 프로게이머가 되려고 결심했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처음으로 PC방이 생겼다. 스타크래프트를 하는데 롤플레잉처럼 정해진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사람과 대결하고 그때마다 새로운 방법을 만드는 게 너무 신기하고 짜릿했다.


'어린 나이에 이런 생각을 했다. 내가 뭐 하나이 이렇게 꽂힐 수 있을까? 그러면서 죽어라 이것만 했다. 처음에 동네 대회에서 우승하면 PC방 50시간 이용권을 주니까 그걸로 더 연습했다. 예전에 대들 게임한다고 두드려 맞고 그랬다. 저도 그랬다. 매일 게임한다고 혼나고, 집에서 쫓겨나고 그랬다>




'당시 처음으로 전국 대회에 나갔고, 그때 준우승을 해서 500만원을 받았다. 기사도 몇 개 났고, 상금이랑 상패, 기사 난 거 스크랩해서 다 어머니 드리면서 게임이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니다 아직 어리지만 처음으로 하고 싶은 일을 찾았다. 프로게이머에 도전하게 해달라'


홍진호의 당찬 각오와 용기로 어머니에게 허락을 받고, 홍진호는 서울로 상경을 하게 된 것입니다.


초창기 홍진호는 상당히 힘들게 프로게이머 시절을 보냈습니다. 양재동에 황제PC방이라는 곳에서 매니저 형이 아는 분이 사장님이었는데, 사정사정해서 구석에 5명의 자리를 마련했고, 잠은 창고에서 2층 침대 2개를 가져다 놓고 잤다.



밥은 항상 못 먹었고, 씻는 것은 화장실에서 앃었는데, 그것도 늦게 일어나면 손님이 있는데 왔다갔다 한다고 사장님이나 알바생들한테 혼나고 그랬다.


홍진호는 이 때가 가장 힘들었고, 위기였던 순간이라고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아마도 프로게이머 초장기 게이머들에 대한 인식이 그다지 좋지 않았기 때문에 홍진호 역시 이런 어려움을 겪었던 것 같습니다. 홍진호, 임요한 시대가 초창기였기 때문에 이들이 게임시장을 닦아 놓은 것이 상당히 주요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네요.


이후 홍진호는 폭풍저그라는 별명을 얻으며, 게이머로 성공하게 되는데요. 그러나 임요한에 가려서 2인자의 이미지가 강하게 있지요.



뭐든 하고 싶은 것은 열심히 했던 홍진호. 프로게이머로 성공을 할 수 있었던 것에는 많은 노력이 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프로게이머 홍진호의 활약을 기대하며, 앞으로도 지금처럼 게이머로 그리고 방송인으로 활약해주길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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